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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자''''의 성서읽기

reviewed by psalter74
2019-01-11

바트 어만의 책을 계속해서 읽게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일단 그는 사본연구 분야에서 뛰어난 신약학자이다. 그러므로 그의 연구를 보면, 통상적인 성서학자들과는 다른 독특한 방식과 철학을 어렵지 않게 엿볼 수 있다. 소위 대부분의 학자들이 ''''정경화''''된 최종판본 자체를 놓고 이러쿵저러쿵 할 때, 다양한 본문들의 차이와 변화, 변조와 위조라는 (대부분의 학자들이 볼 때) ''''다소 위험한'''' 생각을 입증하면서, 성서에 대한 혹은 기독교에 대한 전혀 새로운 결과물을 내놓을 수 있다는 것은, 정말이지 아무나 해낼 수 없다. (그래서 내가 새로움에 탐닉한 사람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사실, 가능한 대로 ''''뿌리'''' 자체에 대한 진중한 탐구가 전제되는 것이, 합당한 현재 그리고 보장되는 미래를 예견할 수 있기 때문에, 사본연구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기존의 사본학 책들이 앞서 말했던 최종판의 우월성을 변호하는 차원에서, ''''절대적으로 믿을 수 있다''''는 입장만을 옹호했던 반면, 바트 어만은 오히려 기독교의 근간을 흔드는 발언을 서슴치 않았다. (그런 학자적 용맹성을 영웅심리로 곡해해서 옹호하는 것도 아니다.) 지금까지 바트 어만의 책 몇 권을 읽었는데, 대부분 주장의 기초가 크게 다르지 않으며, 보다 쉽게 그리고 보다 이슈화해서 진술을 전개하려는 레토릭이 눈에 끌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이 책은 보다 탄탄하며 보다 진보적인 기독교적 미래를 열어주고 있다고 평가하고 싶다.

 

저자는 자신을 신학자가 아닌, 역사학자라고 시종일관 선언한다. 역사적 방법으로 성서를 보게 될 때,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들을 객관적으로, 차분하게 생각하자는 것이 저자의 논리이다. 신앙인들 대부분이 스스로 ''''역사적인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지만, 예를 들면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로마로 유럽에서 북아메리카로 결국 아시아로!, 저자가 제시하는 ''''역사적''''이란 말의 뜻은 전혀 새롭고, (기존의 성서관에 대한) 파괴적이며 또한 (역사적 성서관에 대해서) 건설적이다. 나도 역사비평적(historical-critical) 성서해석에 매료된 사람 중에 하나이다. 왜냐하면 ''''무역사적 성서해석''''이 매우 부적절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그 예를 아전인수적인 혹은 문자주의적 성서해석이라고 볼 수 있겠다). 역사비평이 완전하지는 못하다. 그렇지만 나에게 맞는 것 같고, 또 일차적으로 필요한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역사비평적 성서해석을 실제로 구현하기가 쉽지 않다. 무엇보다도 ''''뭔가를 알고 있다는 건실한[혹은 순진한] 성도들''''이 ''''사실은 그게 아니라, 이런 거다''''라는 식의, ''''무차별적인 진실 쏟아 내기''''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무엇보다도 목회자들이 역사비평을 거부하려는 태도가 바로 이런 점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사실 이점에 대해서 저자는 시종일관 대학과 교회 사이의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 거리감을 아쉬워하며, 동시에 그 책임으로 목회자의 결단력 부족을 지적하고 있다). 

 

이 책은, 내가 혹은 다른 역사비평적 학자들이라면 누구나 의도하였을, 역사비평적 방법론의 실재를 아주 효율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물론 앞서 언급한, 진실은 불편하지만 사실 이렇다라는 식의 고발이 앞부분을 강타한다. 그래야 비록 혼동스럽긴 하지만, 마치 영화 매트릭스에서 실재 세계에 발을 내 딛는 것처럼, 실재 성서의 세계 속으로 들어올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그 실재적인 방법으로 복음서의 수평적 읽기를 제안한다. 수평적 읽기란 복음서를 비교하면서, 하나로 짜 맞추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각 복음서만의 독특한 특징을 반대로 찾아내는 읽기를 말한다(그러한 논리가 맞다면 말이다). 예를 들면, 예루살렘 입성 사건을 비교해보면(막 11:1-10; 마 21:1-11), 마태복음에서는 예수가 나귀와 나귀 새끼위에 함께 올라타고 있는 그림이 그려진다(마 21:7, 여기에서 헬라어 원어를 보면, 그것‘들’ 위에 올라타게 된다). 여기에서 마태복음의 특징이 단적으로 드러난다. 마태는 구약의 메시야 예언을 ‘축자적으로’ 성취되는 수준으로까지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슥 9:9이 표현하고 있는 히브리 시의 반복법을 이해하지 못하고, 문자적 성취로만 이해했던 것이다). 그렇게 보면, 유독 마태복음에 말씀의 성취 구절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며, 더 나아가 마태복음이 나타내고 있는 교회상을 역추적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역사비평적 방법론의 좋은 실례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빼도 박도 못 할 일방통행의 논리를 기가 막히게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믿음을 포기하게 만들지 않으며, 오히려 성서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주는 기회라고 생각하고 싶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것이기에 인간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보수주의적 사고가 아닌, 전적으로 인간적인 것에서(p.305) 하나님을 찾는 일이기에 인간의 성찰적이며 지속적인 해석의 여지가 남게 되는 것은 아닐까? 또한 그것이 바로 역사비평이 추구하는, 순전하며 성실한 학문적 태도가 아닐까? 

 

저자는 이러한 역사비평적 방법론을 필두로 신약성서의 새로운 이해를 시도한다. 그 첫째가 성서 속의 모순을 고찰하는 일이다. 예수의 죽음을 생각해보자: 마가복음(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은 얼마나 큰 차이를 보이는가? (목요일 저녁에) 유월절 음식을 먹고 다음날(금요일) 아침에 죽었다는 마가복음의 기사와(막 15:25), 유월절 준비일의 12시 정오에 죽은 요한복음의 기사에는 분명히 모순이 존재한다(19:14). 이러한 모순을 해결하는 방법은, 취사선택이 아니라, 수평적 읽기를 통해서 각 책의 메시지를 신학적으로 이해하는 길이다. 그러므로 마태와 누가가 베들레헴에서 예수 탄생을 바랐던 이유를 알 수 있으며(왕의 메시야, 미 5:2), 족보의 문제가 있음에도 동정녀 탄생을 말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사복음에서만 국한되지 않는다. 바울에 관한 성서의 언급에서 또한 상당 부분 모순이 발견된다: 즉, 사도행전과 바울 서신 사이에는 엄연한 충돌이 있다: 사도권(갈 1:16-20 vs 행 9), 바울을 알았는지에 대한 여부(갈 :21-22 vs 행 8:1-3; 9:1-2), 아테네에서의 일정(살전 3:1-2 vs 행 17:14-15; 17:16-18:5), 예루살렘 방문 횟수(갈 1:18; 2:1 vs 행 9, 11, 15장), 그리고 유대인과 비유대인이 통합했는지에 대한 여부(살전 1:9; 고전 12:2; 갈 2:8 vs 행 17:4). 이러한 성서 속의 모순을 발견하는 것은, 두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첫째는, 그동안 성서를 어떻게 읽었는가를 반성하게 한다. 우리나라 국민이 정작 우리말을 잘 모르는 것과 같은 아이러니가 여기에서도 발견되는 것이다. 둘째로, 성서가 폐기되어야 하는 모순덩어리가 아니라, 오히려 (역사비평의 기여라고 할 수 있다!) 각 메시지의 독특한 관점을 명쾌하게 만들어주는 수단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3장에서 저자는 이러한 역사비평의 한 걸음 발전된 사항, 곧 양식비평과 편집비평이라는 연구를 도입한다. 이를 통해서 다른 관점이 분명히 존재함을 주장하고, 더 나아가 초대 기독교의 다른 믿음, 곧 다른 메시지들이 있음을 주목하게 된다. 예를 들면, 바울에게는 믿음이 절대적이었고(롬 1-3; 갈 1-3; 갈 5:4), 반대로 마태는 율법을 버리지 않았다(마 5:17-20; 25:31-46). 분명히 다르다. 예수의 죽음에 대한 공동체의 이해 역시 다른 믿음이 반영된다: 마가복음이 속죄의 제사[구원!]로 이해한다면(막10:45), 누가-행전은 예수의 죽음은 의인의 죽음이요 이를 통해 회개와 용서의 메시지로 선포된다(행 2:36-8; 3:17-9). 당시의 강대국 로마제국에 대한 이해 역시 차이를 보인다(롬 13:1-2,4 vs 계 17:9,18). 

 

이제 본격적으로 저자는 성서의 기록자들을 살펴본다(4장). 고대 사회를 재구성하면서(문맹 사회, 위작이 판을 쳤던 사회), 저자는 초기의 전승들(곧 마태,마가,누가,요한이라는 이름이 들어갔던 전승)을 의심하며, 오히려 그럴듯한 설명으로, ‘권위자의 문서로 둔갑한 복음서’라고 제안한다. 이것은 바울 서신에도 동일하게 해당된다(살후, 골, 엡, 목회서신에 대한 설명은 설득적이다). 

 

역사적 예수의 문제는 또 어떠한가(5장). 저자는 역사학자로 접근하기 때문에, 확률게임의 법칙을 제시한다(p.241, 245; 합리화의 문제). 많은 목회자들이 완벽한 것인양 인용하는 C.S. 루이스의 논증은 전제에 문제가 있다고 맞받아친다. 예수를 알기 전에 복음서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결국 복음서는 구전으로, 우리 동네에 찾아온 낯선 사람들이 전했던 황당하지만 진실된 이야기인 셈이다(p.206). 한편, 역사적 예수를 재구성하기에 외적자료는 한계가 있고, 복음서를 통해 4가지 기준을 적용해 본다면(p.212-6) 다음의 예수상이 만들어진다: 종말론적 메시지를 전했고(p.218f), 그의 삶은 성전 청결을 대표적으로 행동으로 표현된 비유(p.231)로 나타내었다. 중요한 것은, 그는 자신을 신이라 하지 않았고, 대신 인자, 하나님 나라의 지배자의 메시야로 제시했다(p.235). *그러므로 이 부분에 대해, 복음주의적 견해를 가진 학자들이, 초대교회도 예수를 신으로 이해했고, 또한 경배했음을 주장하는 반론을 벌이고 있는 상황이다. 

 

이제 저자는 일종의 ‘만들어진 기독교’라는 자신의 독특한/위험한 주장을 보다 구체화한다. 바로 성서가 어떻게 완성되었는지를 살피는 일이다(6장). 이를 통해서 교회의 이면을 엿볼 수 있다는 것이 사실 저자의 의도이다. 교리가 주된 타겟이다. 의도적으로 원문이 변개되었고(삼위일체[요일 5:7-8]), 다양한 다른 믿음을 가진 집단을 반격하기 위해서 성서가 ‘선택’되고 결국 “은근슬쩍” 정경화되었다(p.259). 그렇다면 다른 믿음을 가진 집단들은 누구란 말인가?(물론 복음서들 자체도 다양한 믿음을 보여주지만 말이다.) 저자는 이단이라고 규정된 집단들을 소개한다(에비온: 유대교적 뿌리-율법(할례) 추구 구약의 하나님 vs 바울; 마르시온: 친바울, 율법의 구원반대 신약의 예수). 그리고 다양하고 재미있는 외전들도 소개한다. 결국 정경을 이해하려면, 저자의 말과 같이, 초대교회의 지배권 다툼의 일을 알아야한다. 이는 계속해서 정통과 이단에 대한 문제로 자연스럽게 넘어가는데, 저자는 발터 바우어의 초대 문헌 연구(2-3세기엔 마르키온, 영지주의가 우세한 곳이 많았다)를 다시 점검하면서, 초기 교회는 이단과 정통을 구분하지 않았으며, 로마의 종파가 최후 승리를 얻었고, 바로 이것이 기독교를 결정한 것일 뿐이라고 역사를 새롭게(혹은 다시) 평가한다. 정경화 자체가 인간의 과정인 셈이다(p.298, 300f). 이는 성경을 읽는 사람보다 성경을 숭배하는 사람이 더 많다(p.304)는 속설을 반증하는, 독특한 기독교 문화이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기독교의 영향을 회고한다. 우리가 너무나 확신하고 있는, 일종의 기본 교리와 같은 부분에 대해서 저자는 지금까지 연구한 결과들을 축적하여, 가감없이 단호하게 평가한다: 

1)고통받는 메시야: 기독교인이 구약의 예언을 성취했다는데 왜 유대인은 그것을 믿지 않는 것일까? 유대인의 메시야는, 고통받는 메시야가 없었기 때문이다(308). 기독교가 사 53; 시 22를 이용하고 있지만, 거기엔 메시야란 단어조차 없다. 유대적 개념: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 하나님의 일을 맡은 자, 왕(삼상 10:1; 레 4:3,5; 시 2:1-9; 솔로몬의 시편 17:21-32). “미래의 메시아는 위풍당당하고 강력한 힘을 지닌 인물이어서 하나님의 적을 섬멸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비롯한 이 땅의 모든 민족을 엄하게 다스릴 거란 생각이었다.”(313; 에녹1서 69; 에스라4서 13:1-11). 그러므로, 기독교는 새로운 믿음을 뒷받침할 근거를 찾아 성경을 뒤졌다(315). 

2) 반유대적 성향: 사실 예수는 유대교의 새로운 해석자요, 종말론적 예언자였다(마 22:40). 에비온파가 유사한 종파로, 마태복음도 그렇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율법폐기적 주장이 대세(갈 5:4). 왜? 예수가 고통의 죽음을 당한 메시아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대인은 후대에 악마의 자식이 된다(요 8:42-44, 19-20장). 반유대주의는 기독교의 발명품이다(328). 

3) 예수의 신성: 예수 부활 이후 신성의 소유(행 2:36; 고전 13:32f); 그러나 공생애도 역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알리고자 함(바로 침례; 막 1:11; 여기에서 하나님의 아들은 신이 아닌 신의 매개자); 누가와 마태(잉태되는 순간; 눅 1:35의 ‘그러므로’); 요한은 영겁의 과거로 올라감(1:1-14); 요한공동체(루이스 마틴; 레이먼드 브라운: 변화된 공동체의 반영: 하등기독론에서 고등기독론으로 갈등 속에서 진화;“위로부터 탄생”) 

4) 삼위일체: 유일신의 유대교(사 44:6). 특별한 인간(에비온)-예수는 자비의 하나님이었을 뿐(마르키온); 비정통적-정통파: ①성부수난설: 오직 한분(양태론=사벨리우스주의)vs별개의 세 위격(삼위일체, 터툴리안) ②아리우스주의: 4세기, 하나님에게 종속된 예수의 신성(유사본질homoiousias)vs동일본질homoousias(아타나시우스)=>니케아회의(325년) 

5) 천국과 지옥: 초기의 종말론적 내세관(수평적 이원론): 하나님나라의 임재로 악의 척결-육신의 부활이란 아직 오지 않은 시대-이 땅에서의 삶(살전 4-5; 계 21). so long->벧후 3:8; 종말에 대한 진지한 고민; 천국과 지옥의 탄생(수직적 이원론; 354f); 베드로묵시록; 영혼불멸설. 

 

대단한 주장이다. 사실 이러한 주장은 이러한 대중적인 서적만으로는 불완전하다. 보다 학문적인 논의와 전거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의 전환은 매우 중요하다고 하겠다. 그 이유는, 저자의 말과 같이, 이러한 연구결과를 통해서, 종교 자체의 무용성을 논하려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라는 종교가 본래 가지고 있었던 핵심적인 생명력을 재검하게 도와주기 때문이리라. 일전에 불트만이 사고했던 바와 같은, 예수는 신화이며, 그 신화 속에서 나의 실존적 자세가 요구된다는 깨달음이, 바트 어만에게도 발견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 신화의 깊은 가르침이 나와 우리의 실재에 아무런 영향력을 끼치지 못한 다면, 우리는 믿음을 버리게 된다(p.366-9) 역사비평은 신학적 주장의 새로운 판별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적 상황에서의 윤리적 문제를 재해석한다는 순기능이 분명히 있다. 금기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성경을 역사적인 관점에서 읽을 때, 우리는 성경을 완전히 새로운 시각에서 이해하며 성경에 담긴 다양한 메시지를 찾아낼 수 있다”(p.374) 저자의 이 주장에 나는 동의한다.

Jesus, Interrupted: Revealing the Hidden Contradictions in the Bible => ISBN: 9780061173943 주문가능

Ehrman, Bart D.
HarperOne Publisher
20090303
HB ? 0 x 0 x 0 Inch 0.46 kg 304 pages ISBN 9780061173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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